행9:1-19
서론
그리스도인의 삶은 회심(conversion)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누구나 회심을 거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 회심은 그리스도인 삶의 출발점이지만 종착점은 아니기에, 회심을 통하여 새로운 신앙인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는다. 한 영혼이 거듭나는 것은 일순간의 기적이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 형성되는 것은 일평생의 과제인 까닭이다.
회심이란 무엇인가? 회심이란 한 인간이 자신의 죄로부터 돌아서서 믿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기로 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회심이란 회개와 믿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우리 심령의 방향전환이다. 우리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로부터 돌아서며, 믿음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존재의 문을 열고 구원자 하나님을 우리 존재 속에 영접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존재 속에 영접할 때,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의 생명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회심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성격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
회심 사건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우리 인격과 성품의 변화를 수반하지만 인격과 성품의 변화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핵심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회심 사건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핵심인가?
회심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좀더 교양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인격의 한 부분이 수선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사라질 존재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음으로써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뜻한다.
<회심과 회개>
회심(conversion)과 회개(repentance)는 기독교 구원론에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는 회심과 회개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라도 구분하여 단어적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회심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를 떠나 살던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잠정적 마음행위로써 구원의 일부로서 단회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맞이하여 그에게로 돌이킨 사람은 성도로서의 지속적인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회심을 계속해서 되풀이 한다면 그 앞서의 회심이 올바른 회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양상인 것이다.
회심은 거듭되는 성도의 신앙행위가 될 수 없으며 맨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영접하는 그 순간에 한번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에 반해 회개는 성도의 일상생활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표현이다. 회개는 날마다 해야할 성질의 것이며 시시때때로 해야만 한다. 이 세상에서 회심한 성도라고 해서 이제는 죄와는 완전히 단절된 완성된 구원의 영역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다.
성도는 회심(conversion)으로 시작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세상에서 죄와의 투쟁가운데 살아가게 된다. 따라서 구원을 소유한 회심한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의 유혹과 공격 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요구에 부족한 자신의 죄된 삶을 확인하여 고백하는 것이 곧 회개이다. 이 회개는 살아있는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며, 그러한 올바른 회개를 통해 좀 더 장성한 성도로 날마다 자라가게 되는 것이다.
<회개와 후회>
회개와 후회를 구분하는 데는 상당히 애매모호한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고 있는 어의적인 면에서, 그 의미상으로 보아서는 매우 분명히 구별된다.
회개는 현대의 용례상 오직 기독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며, 후회는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들에게 공히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이다.
회개는 참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삶이나 행위를 하나님께 비추어 보아 잘못된 부분을 고백하는 것인 반면, 후회는 어떤 사실에 대해 스스로 자탄(自歎)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회개가 있을 수 없다.
즉, 후회하는 자는 자신의 사고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원통해 하며 애석해 하는 것으로 후회할만한 객관적 실체는 있으나 그 후회를 받을 인격적 대상은 없다. 이러한 후회는 스스로 원통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회심은 회개나 후회와 구별되는 단어이다. 그 의미상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측면에서 보아 회심과 회개는 성격이 비슷하며,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면에서 회심은 회개나 후회와 관련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성격상 비슷하다는 것이 동일하다는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러나 회심이 단회적 사건임을 생각할 때 회개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회심의 대상이 인격적 하나님임을 감안할 때 후회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처럼 그 쓰이는 용어들을 올바르게 잘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회심이 전적인 하나님의 관여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자신의 반응의 형태라 할 수 있으며, 후회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인간 스스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A. 바울의 회심(Conversion)의 사건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있는 사울은 예수가 바로 다윗이 예언한 구세주이며,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리스도 즉 메시야라고( 행2:25-28; 시16:8-11 (참고 눅24:27).) 선전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격분하였으며, 더욱이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죽인 예수 즉 메시야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삼일만에 다시 부활케 하셨다 하며, 유대인들이 이러한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여 주실 것이라고 하는 말에 분노하여,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거룩한 성전과 율법을 거스리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독한다하고 특히 스데반을 신문할 때 증인으로 섰고, 돌에 맞을 때에는 그가 사형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행 7:55-58, 8:1.) 주장하였으며, 또한 다메섹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옥에 넣기 위해 산헤드린에서 발급한 정식공문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가게 되었다.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강한빛을 보매 그는 땅에 엎드러졌다. 이때 그는 눈을 뜰수 없었으며 홀연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그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나이까” 하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자가 있느니라” 하셨다. 동행인들은 그소리만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고 서 있기만 하였다.(행 9:6-9) 바울과 함께한 사람들에 손에 이끌려 다메섹에 들어가 아나니야를 만나 아나니야의 인도에 따라 시력을 회복하였으며, 그에게 세례받고 모든 사람 앞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보고들은 하나님의 섭리의 증인이 될 것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하였다.
바울의 다메섹 도사에서 회심의 사건은 사도행전에 삼회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회심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 사도행전 9장 7절에는 동행인이 소리는 들었으나 보지는 못하고,
- 사도행전 22장 9절에는 빛은 보았으나 소리는 듣지 못하고,
- 사도행전 26장 13절과 14절에는 밝은 빛이 내려와 함께 가던 사람들은 두루 비추었다 하였다.
문제는 표현하는 글에 뜻있는 것은 아닌 줄로 안다. 바울은 분명히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 “맨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같은 나에게도 보이셨느니라” 증거하였다. 그리스도인의 박해자였던 사울은 그를 복음전하는 사도로 부르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B. 회심의 신학적 의의
바울의 회심에 대한 의의는 전술한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 기록과 바울 자신이 쓴 서신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누가가 기록한 사도행전은 전설적이고 객관적인데 비해, 바울 자신이 쓴 서신( 갈1:15-16; 고전9:1-2; 고후4:5-6.)에는 바울이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그리스도 안에서 체험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상 바울의 회개의 계기는 바로 바울 자신의 주관 상태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이방에 복음을 전파할 주의 사도로 쓰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역사였다고 하는 편이 올바른 해석이 될 것이다.( 행22:21; 고전15:8-10; 엡3:7; 갈1:1; 엡1:1; 딤후1:1.)
그리고 바울의 신앙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자기의 잘못된 신앙관을 깨닫고 회심한후 그의 신앙은 180도로 변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고 믿었다.(빌 3:7-9)
바울은 회심 전에 하나님을 섬기던 율법적인 신앙관을 바꾸어 복음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도됨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확신을 그는 그리스도가 그에게 나타나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를 택정하셨다고 하였다.(갈 1:15-16) 하나님은 바울의 전 생애를 영광가운데 인도하셨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오심과 자기의 성별은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것이라 했다.(엡 3:7-9) 바울의 이같은 확실한 신앙은 마침내 자신을 이방인들을 구하는 복음의 사도라는 불같은 사명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골 1:25)(딤후 1:9-11)
C. 부활에 대한 바울의 확신
바울 자신도 회심 이전에는 일반 유대인과 같은 사고 방식으로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기독교인들이 유포한 한낱 유언비언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 들이야말로 기존 유대 종교를 혼란시키는 이단자로 간주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가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확증을 얻게된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11절에 보면 그가 극적인 내적 각성을 설명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생애가 전환케 된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의 신앙의 핵심이요 또한 바울의 신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에서 여러번 언급하고 ( 고전15:1-21; 롬1:4; 고후5:15; 빌3:10-11; 롬6:5-10.) 있으며, 고린도후서 5장1절에서 21절에는 예수의 부활의 역사성을 다루고 있고 기독론의 기초가 되어 있다. 예수 부활의 사상이 바울에게 있어서 얼마만큼 ‘핵심적인 것’ 이었는지는 데살로니가 후서와 빌레몬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고 있다.( 롬6:47:4; 고전6:14; 고후13:4; 갈1:12:20; 고전15:21-22; 엡1:20; 빌3:10-11; 골3:1-3; 살전1:105:10; 딤전2:5-6; 딤후2:8; 딛2:14.)
바울은 부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단호하게 선언한 것은 고린도전서 15장 15절에서 19절에 잘나타나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도 신학적인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직접 체험한 경험에서 얻은 최대의 사건이었다. 바울에게 있어서 부활의 사건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으며 그의 모든 생활의 초점은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의 현존 안에서의 삶에 맞추었다.( 갈2:19-20; 고후5:13-15; 빌1:20-213:7-9,10-14.)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1,2절)
말씀을 보면 사울은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결박해 오기 위해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였던 것이다.
주님을 핍박했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1. 주의 제자들에 대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1-2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1,2절)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을 혈기가 등등하여 붙잡아 오려고 다메섹 도상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니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갈 1:13-14절)
사울은 주님을 만나기전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잔해하였다.
2. 네가 어찌히여 나를 핍박 하느냐(3-9절)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치는지라,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떳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동안을 보지 못하고 전폐하니라”(3-9절).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들을 붙잡으려고 가다가 본인이 주님께 붙잡혔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말씀처럼 주님께 잡힌 바 된 그것 사명을 위해 좇아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면 사명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3. 택한 나의 그릇이라(15 -18절)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의 충만케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15-18절)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던 사울이 다시 주님은
아나니아를 환상중에 불러 그를 보내어 사울에게 안수하매 그가 다시 보고 성령 충만함을 입고 강건해진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갈 1:15-17절).
사울은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사명의 중요함을 깨닫고 주의 제자들과 혈육을 만나지 아니하고 영적 훈련장인 아라비아로 가서 사도로서 영성을 다듬었다.
결론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말씀에 주님을 만나고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다’ 라고고백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겠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복음 사역을 감당 할 수 없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 3:12). 말씀처럼 주님을 만나는 순간 사명을 깨닫는 은혜가 넘쳐야 한다.
주님은 주님을 핍박하던 사울을 불러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은 계획하신다. 죽어 마땅해야만 했던 사울 그를 주님은 가장 중요한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던 것이다.
우리는 이 순간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복음을 위해 일할 수 있다. 이 시대 주님은 참 목자, 참 성도를 찾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댓글 남기기